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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명대 동북강역 연구성과와 문제점 분석
초록
중국의 연구 성과들은 80년대 이후 중국의 역사적 강역과 관련하여 전 만주지역이 명의 강역이라는 이론을 체계화시켜 나가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중국 강역사 연구의 문제점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우선 강역사 연구의 중요 쟁점이었고 본 연구의 분석대상이 되었던 장성의 동단기점 추적을 통해 압록강 유역 호산산성이 그 기점이 될 수 없음을 우선 검토하였다. 중국이 만리장성의 동단기점이라고 주장한 호산산성은 명대 요동방어를 위해 설치한 요동변장 방어선으로서 강연대보가 설치된 지역이기는 하지만 만리장성과 같이 벽돌장성이 수축된 적이 없으며 하나의 전초기지에 불과함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이 지역은 초기부터 명의 행정력이 미치던 관할지역이 아니라 명과 조선의 국경중립지대였으며 여진의 점진적 성장으로 명이 요동도사를 방어하기 위해 후기에 설치한 것이 강연대보였다. 즉 강연대보는 국경 중립지대에 설치된 전초기지였으며 압록강 변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감시하고 소규모의 여진족을 방어하는 기능을 할 뿐 만리장성과 같은 선으로 연결된 성벽 축조물이 아니었다. 또한 산해관에서 철령을 거쳐 압록강 변으로 방어선을 형성한 요동변장 역시 벽돌로 축조된 것이 아니며 주로 자연 형세를 이용한 것으로 장성지대와 같이 완벽하게 연결된 일선의 성벽이 아니었다. 요동 방어의 중추인 위소제도 역시 살펴 본 결과 요동도사 소속 25위는 군사적 규모와 역할 등에서 매우 불규칙하고 많은 부역을 담당하였으며 1위 5600명의 정규적인 衛로 구성되지 않아서 내지의 군사 편제와도 다른 특수성을 보여 줌으로써 견고한 방어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둘째로 명대 두만강과 백두산이 명의 강역이라는 중국의 논리를 재 고찰하여 문제점을 지적해 보았다. 그 결과 두만강과 백두산 지역에 명이 설치했다고 하는 여진위소들은 여진족의 부락에 위소의 이름을 형식적으로 붙인 것에 불과하였다. 명나라가 영락연간 집중적으로 여진지역에 설치한 다수의 여진위소는 군사적인 정벌을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며 대부분 여진의 촌락에 명이 자의대로 위소의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여진위소는 민족, 인구수 등 모든 면에서 명나라 내지의 위소와는 전혀 다른 전통적 여진부락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지적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보조하는 자료가 『滿洲源流考』인데, 『滿洲源流考』와 같은 청대 사료는 명나라가 지배한 요동의 강역을 開原, 鐵嶺, 遼陽, 瀋陽. 海州, 開州 등에서 끝난 것으로 파악하며 그 동북(여진) 지역은 중 후기로 갈수록 烏拉, 哈達, 葉赫, 輝發 등 여러 여진의 세력권에 속해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백두산과 두만강 유역에는 명나라 군사의 실질적인 진출도 없었고 명의 강역이 될 수 없다. 나아가 중국의 연구성과들은 여진 지역에 설치된 명의 위소가 매우 명확하고 명나라의 명령지시를 받은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滿洲源流考』와 같은 사료는 여진위소에는 상당수가 그 실체와 위치도 알 수 없는 ‘虛名’의 衛所가 많았고 그 강역의 원근에 대해서도 알 수 없으며 山川, 城站의 지명과 진위도 애매모호한 것이 많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요약하면 명대 강역은 명의 위소제도의 특수성, 여진위소의 형식적 설치, 명나라의 압록강 두만강, 백두산 지역으로의 진출 실패, 노아간도사의 쇠퇴 등의 원인으로 명의 영향력은 요동도사 지역에 한정되었고 흑룡강, 백두산, 두만강 등의 지역을 그들의 판도로 만들 수는 없었으며 결국 힘이 미치지 않는 ‘版圖外’의 지역일 수밖에 없었다.
키워드
- 제목
- 중국의 명대 동북강역 연구성과와 문제점 분석
- 제목 (타언어)
- Analysis of Research Performance and Problems Pertaining to the Northeastern Territory during the Ming Dynasty Era in China
- 저자
- 남의현
- 발행일
- 2009-09
- 유형
- Y
- 저널명
- 인문과학연구
- 호
- 22
- 페이지
- 189 ~ 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