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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년 조선과 대마도의 壬申約條 체결과僞使 문제
초록
1510년 三浦倭亂 직후인 1511년과 1512년 對馬島는 日本國王使 弸中을 두 차례 파견하여 단절된 朝鮮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511년 일본국왕사는 牙符를 가지고 있던 大內殿에게 대마도가 일본국왕사 파견을 청부한 것으로 소위 ‘僞使’라고 볼 수 있다. 다만, 1512년의 일본국왕사는 幕府로부터 정식의 牙符를 발급받았는데, 막부가 삼포왜란 이후 대마도의 修復 교섭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또 1511년 일본국왕사 弸中이 조선에 왔을 때, 그는 삼포왜란과 관계없는 여러 섬의 왜인, 특히 少貳殿의 使送이 조선에 올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 결과 1512년 1월 조선에 少貳殿의 使船이 와서 통교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은 대마도가 창출해서 조선에 보낸 위사였다. 따라서 1511년 일본국왕사 弸中이 대마도의 청부를 받았거나, 또는 대마도와 少貳殿 僞使 파견을 결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512년 대마도는 일본국왕사 弸中, 大內殿의 使送, 대마도의 特送을 조합하여 조선의 요구대로 삼포왜란을 일으킨 首謀者의 首級을 가지고 와서 재차 조선과의 화친을 요청하여 마침내 壬申約條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임신약조의 내용은 조선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대마도의 경제적 상황을 반감 또는 약화시키는 조치들이 많았다. 이에 대마도는 임신약조 직후부터 폐지되었던 조항을 무력화시키거나 부분적으로 개정하는 시도를 하였다. 대마도는 임신약조에서 특송 파견이 폐지되었음에도 여러 차례 특송을 파견하여 조선의 접대 가능 여부를 시험해 보고 歲遣船을 늘리려고 노력하였다. 또 僞日本國王使를 지속적으로 파견하여 薺浦로 국한되었던 浦所를 釜山浦까지 추가하였고, 세견선을 25척에서 30척으로 증액시켰다. 그리고 대마도는 사망자의 名義나 가공인물을 만들어 島內의 세견선 증액을 시도하였고, 이 僞名을 통한 방법을 深處倭에게 적용시켜 일본 본토의 受職・受圖書人을 증가시키는 것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즉 임신약조 이후 대마도가 通交權을 확대한 방법 중 하나로 심처왜 명의를 이용하는 것이 더 광범위해졌으며, 이는 僞使의 확대로 이어졌다. 대마도 宗家에 秘藏되어 있던 圖書와 木印은 이러한 대마도의 僞使 파견을 실증하는 것이다.
키워드
- 제목
- 1512년 조선과 대마도의 壬申約條 체결과僞使 문제
- 제목 (타언어)
- The 1512 Conclusion of the Imsin Agreement between Joseon and Tsushima and the Issue of Wisa (False Envoys)
- 저자
- 한성주
- 발행일
- 2025-11
- 유형
- Y
- 저널명
- 한일관계사연구
- 호
- 90
- 페이지
- 181 ~ 222